[16.]



네 명의 여인이 트레버의 육중한 팔다리에 한 명씩 달라붙어 그를 감금실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계단 근처에서는 마리아와 프릴이 부름을 연이어 부둥켜안는 중이었다. 민첩성에 자신이 있다는 두 여인은 현위치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부름이 신호탄을 터뜨리면 나머지 여인들을 1층 하갑판의 샤워장으로 인솔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래서 최전방으로 떠나는 부름과 미리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조심하세요, 선생님.”

“여러분도요. 다시 만날 땐 육지에서 봐요.”



베르나트와 소냐는 부름을 따라 선미 쪽의 삭구 보관실로 갔다. 그곳에서 사다리로 사용할 밧줄을 훔칠 요량이었는데 삭구 보관실의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다행히 정리정돈을 등한시하는 해적들의 평소 행태 덕에 화물 상자 사이에서 밧줄 다발을 찾아 냈다. 밧줄은 총 1.5층 길이로, 요건을 충족했다. 그 밧줄을 일정한 간격으로 매듭지어 발디딤을 만드는 것은 여인들의 몫이었다.


선미 계단에서, 부름은 두 번째 작별 인사를 나눴다.



“선생님 혼자 너무 위험한 일을 도맡으신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요.”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배에서 빠져나가는 대로 육지로 달아나세요. 아셨죠? 전 어떻게 해서든 뒤쫓아갈 테니까 망설이시면 안 돼요.”



좀체 맞잡은 손을 놓질 못하는 여인들을 간신히 떠나보내고. 부름은 신발 크기의 주머니를 긴장한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숨죽여 계단을 올랐다. 한때 총과 검과 군화가 분주히 돌아다녔던 2층 하갑판은 텅 비어 있었다. 1층 하갑판에는 사람이 있었으나 고작 두 명이었고, 계단에서 멀리 떨어진 식당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어 당장 위협이 되지 않았다.


진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상갑판이었다. 해치 밖으로 머리를 빠끔 내밀어 주위를 둘러본 부름은 밖이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한눈에 누치를 발견했다. 누치는 육지가 보이는 방향으로 난간에 기대서서 시가(cigar)를 피우고 있었다. 한쪽 어깨에 라이플을 메고 있는 누치의 존재는 가히 위협적이었으나, 그나마 부름이 가려고 하는 선미 갑판과 반대 방향에 있었다. 부름은 누치의 뒷모습에 경계하는 시선을 못박은 채 낮게 움직여 1층 선미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은신했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머리 위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와 온 내장이 들썩였다. 부름은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배럴 사이에 자신을 구겨 넣었다. 계단 디딤판 사이로 내려오는 군화가 보였다.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디딤판을 밟을 때마다 부름의 심장도 함께 지르밟혔다.



“이게 뭐냐, 우리만 배에 남아서. 작전 나간 놈들 부럽다. 지들끼리만 재미 보고.”

“부럽긴 씨발. 야간 매복은 하나도 안 부러워.”



팔라딘과 쟈크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누치를 부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허공에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셋으로 늘었다. 부름은 발광하는 심장 때문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지만 애써 추스르며 지금까지 발견한 해적의 수를 세었다. 의식을 잃은 트레버까지 포함하여 총 여섯 명. 부름이 입수한 정보가 틀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 마주칠 해적은 없었다. 무장한 해적들은 배 허리 부근에 모여 있고, 새벽은 만물을 집어삼키는 짙은 밤을 닮았으니 바야흐로 과감하게 행동 개시할 타이밍이었다.


부름은 줄곧 가지고 다니던 주머니를 열었다. 그 속에는 알코올 램프처럼 생긴 수제 폭탄 세 개와 점화용 틴더 박스가 들어 있었다. 그는 각오를 다지는 심호흡을 끝으로 계단이 드리운 장막 속에서 빠져나갔다. 재빠르게 계단을 오르고, 들킬세라 납작하게 엎드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2층 선미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한 번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선장실이 소재했다. 폭탄을 설치할 지점을 결정한 부름은 손이 심하게 떨리는 가운데 두 개의 폭탄에 불을 붙였다. 심지가 가장 긴 첫 번째 폭탄은 방금 올라온 계단의 마지막 디딤판에 설치했고, 냅다 다음 계단으로 뛰어가서 그곳에 두 번째 폭탄을 설치했다. 그럼으로써 해적들이 폭발음을 따라 선미 끄트머리로 오게끔 유도하려 했다. 해적들의 이목이 선미에 쏠린 사이 선수 쪽에서 대기 중인 여인들이 샤워장을 통해 탈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창출하는 게 부름의 목표였다.


쾅! 첫 번째 폭발음이 고요한 새벽을 흔들었다. 태평하게 담배를 피우던 해적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아 들며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뭐야?!”). 식당에 있는 해적들도 즉각 일어서서 선미 쪽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쾅! 연이어 두 번째 폭탄이 터지자 해적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모두가 소리의 발생지를 향해 달려갔다.


2층 선미 갑판으로 올라간 부름은 난간 뒤에 낮게 웅크리고는 아래층 동정을 살폈다. 두 마리의 먹구름 용이 승천하는 현장으로 해적들이 다급히 모여들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여인들도 속속들이 샤워장에 집결해 난간에 밧줄을 묶어 내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부름은 너무 가까이에서 터진 폭탄으로 인해 촉발된 현기증을 이겨 내야 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두 뺨을 찰싹찰싹 때렸고, 유난히 한쪽으로 비틀거리면서 갑판을 가로질러 갔다. 2층 선미 갑판 중앙에는 박공 지붕 모양의 유리 채광창이 나 있었는데, 주어진 시간만 충분했다면 선장실을 엿볼 수도 있었던 그곳에 마지막 폭탄을 설치했다. 그러고는 배의 꼬리를 향해 달려가면서 난간을 뛰어넘어 바닷속으로 다이빙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런데─


그런데 난간에 배를 부딪치면서 내려다본 바다가 까마득히 멀리에 있었다. 미래보다 훨씬 먼, 죽음의 거리였다. 이런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건 다이빙보다 투신 자살에 가까웠다. 마침 바닷물 색도 새카매 불길하기 이를 데 없으니 부름은 지레 겁먹었다.


쾅! 마지막 폭탄이 유리 파편을 사방에 흩뿌리며 터졌다. 폭발의 원인을 찾아 우왕좌왕하고 있는 해적들이 폭탄 테러범이 주저하고 있는 2층 선미 갑판으로 들이닥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부름에겐 더 이상 머뭇거릴 겨를이 없었다. 그는 눈 딱 감고 하늘을 달렸다. 한 걸음도 못 나아가고 그대로 수직 낙하했다. 낙하산이라도 펼칠 셈인지 몸 속의 내장이 뿔뿔이 흩어져 싫은 느낌을 선사했다.


잔잔한 바다에 높은 물기둥이 솟구쳤다. 수많은 거품이 바닷물에 잠긴 부름의 몸을 휘감았다. 제법 깊게 가라앉았는데도 발에 닿는 것은 저항력이 느껴지는 물살뿐이었다. 배가 수심이 깊은 곳에 닻을 내린 덕에 맨땅에 헤딩하는 참사는 면했다. 그러나 이어서 뇌리를 때리는 깨달음:



「나 수영할 줄 모르는데!」



유학길을 떠나기 전까지 부름의 삶은 산 속에 고여 있었다. 산에는 계곡와 온천이 있었지만 수영을 배우기에는 마땅치 않은 장소였다. 그렇게 수영이 배제된 삶을 살아오다가 난데없이 실전에 돌입하게 된 부름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바닷속을 무작정 달리고 보았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휘저을수록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을 뿐이었고…….


산소가─생명이 덧없이 소모되고 있었다. 기껏 인간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건만, 장엄한 자연을 상대로 꼼짝없이 이울었다. 물살을 박차고 할퀴는 힘이 점차 약해졌다. 의식이 바닷물에 용해되면서 주마등에 불이 깜박깜박 점멸했다. 그때였다. 딱딱한 물체가 부름의 손목에 콰득 달라붙었다. 악력이 그를 위로 이끌었다. 부름은 끌려가는 방향에 힘없는 시선을 둔 채 공기 방울을 꼬르륵 뱉었다. 그를 잡아 끄는 손의 정체가 도망자들을 뒤쫓아온 해적일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지금으로선 물 밖으로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달빛이 내리쬐는 수면에 가까워지고서야 부름은 인어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살랑살랑 춤추는 긴 금발머리를 식별했다.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통에 드러난 귓바퀴와 목덜미가 달빛으로 희게 물들었다. 질식이 임박한 상황에서 본 그 광경은 신비롭다 못해 신성할 따름이어서, 부름은 마리아가 성불하는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천사로 보였다.


수면 위로 두 사람의 머리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부름은 숨구멍에 들어찬 물을 빼는 것과 산소를 빨아들이는 걸 동시에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면 마리아는 미소를 띄울 만큼 여유로웠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선생님께서 산에서 나고 자랐다는 말씀을 하신 게 불현듯 기억났어요. 왠지 수영을 못하실 것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먼저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다행히 제 판단이 맞았네요. 괜찮으세요?”

“네헤……. 고마…… 허요…….”

“가요. 제가 육지로 데려다 드릴게요. 지금쯤이면 다른 사람들도 거의 다 내려왔을 거예요.”



든든한 손길이 부름을 이끌었다. 두 사람 다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채 나아가고 있어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여인들을 볼 수 있었다. 부름이 강하 지점에 다다랐을 즘엔 마지막 주자인 프릴이 과감하게 배 표면을 발로 퉁퉁 튕기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우연찮게 부름, 마리아와 합류한 프릴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머리카락과 뺨을 뜨겁게 불태웠다.



“젠장! 우리 좀 봐요. 배 밖에 있다고요! 멍청한 해적 놈들은 아직도 우리가 감금실에 갇혀 있는 줄 알겠죠?”



마리아는 프릴의 닫힐 줄 모르는 입을 향해 물방울을 튀겼다.



“설레발 치지 말고 진정해. 선생님께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하셨잖아.”

“그렇긴 한데에─ 너무 신난단 말이야!”



피랍자들은 해적들이 모래사장에 남겨 놓은 발자국을 토대로 그들의 이동 경로를 유추하고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도주로를 열었다. 날이 밝기 전에 해적선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져야 했으므로 모두가 말없이 숲 속을 달리는 데 전념했다. 아직은 어둡기만 한 하늘 아래 온통 비슷하게 생긴 나무와 덤불이 시야를 끊임없이 휙휙 지나쳐 가니 제자리 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단조로운 배경에서 반복되는 동작을 하고 있는 부름은 차츰 몽롱한 사색에 잠겼다. 그간 배에서 겪었던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라 한 편의 기구한 단막극을 완성시켰다: 납치, 감금, 추행, 음해, 절도, 탈옥─이 모든 게 10일 동안 겪은 일이라니. 남들에게는 평생에 걸쳐 조금씩 누적되는 시련이 부름에게는 한꺼번에 휘몰아친 모양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고통의 시간이 과거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제 부름이 달려가고 있는 곳에 놓인 것은 눈부신 해방이었다. 쓰디쓴 고통을 지불해서 얻은 육체의 자유가 오늘의 태양과 함께 찬란히 떠오를 예정이었다. 이미 먼동의 행차를 예고하는 연보라빛이 밤하늘을 서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아우우……. 어딘가에서 늑대가 울었다. 깜깜한 숲 속에 울려 퍼지는 늑대 울음 소리는 발길뿐만 아니라 희망에 부푼 상상까지 중단시켰다. 앞서 나아가던 사람들은 뒷사람을, 뒷사람들은 황급히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짐승의 안광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듯했다. 안심한 부름은 경계를 느슨히 한 후 동요하는 여인들을 진정시켰다.



“이 근처에서 난 소리가 아닌가 봐요. 그래도 숲에 늑대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다 함께 모여서 이동해요. 밀집 대형으로 움직이면 짐승들도 쉽사리 덤비진 못할 거예요.”



그 말에 동의한 여인들을 한 덩어리가 되기 위해 부름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오직 부름의 뒤쪽에 서 있는 마리아만이 옴짝달싹 않고 치마 자락을 움켜쥔 채 주위를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다. 부름은 마리아를 달래며 그녀의 굳은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리아 씨. 제가 지켜 드릴게요.”

“지켜 주신다고요? 어떻게요? 무기도 없잖아요.”



마리아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걸 처음 본 부름은 내심 당황했다.



“그러니까…… 아, 짐승들은 불을 무서워하잖아요. 저한테 틴더 박스가 있거든요.”



그러나 그 틴더 박스는 바닷물에 젖어 못쓰게 된 후였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마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선생님. 짐승이라니요. 상대는 총이에요.”

“네?”



마리아는 뒷걸음질로 피랍자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개인이 되었다. 부름은 머리를 높게 올려 묶는 그녀에게서 전에 없던 거리감을 느꼈다. 그가 배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바다와의 거리만큼이나, 또는 그보다도 아득히 먼 거리가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다. 마리아와 가깝게 지내던 여인들 역시 이질감을 감지했다(“마리아 언니……?”). 마리아는 다 묶은 머리를 부채처럼 펼치고는 한쪽 팔을 들어 부쩍 밝아진 하늘을 가리켰다.


또렷하고 강인한─



“사격 준비.”



─낯설어도 분명히 그녀의 것인 목소리.


그러자 사방에서 불덩어리들이 화르륵 타오르는 동시에 철컥거리는 총탄 장전 소리가 무리를 에워쌌다. 나무 사이에서 나타난 횃불들이 익숙한 얼굴들을 밝혔다: 좌측에는─아레나이, 쥬본, 월터, 피콕; 우측에는─카일, 니콜, 울리히, 카를. 하나같이 무표정인 해적들은 피랍자들을 총으로 겨눈 채 나무와 수풀 뒤에서 걸어 나와 포위망을 좁혀 갔다.


부름은 해적들에게 포위된 게 자명한 이 상황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마리아가 명령하는 어조로 그들을 불러낸 순간부터 그가 알던 상식과 질서가 모조리 불가해하게 꼬여 버렸다.



“마리아 씨……. 어째서…….”

“틀렸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태양이 마리아의 얼굴을 비추었다. 좀 전에 찾지 못했던 짐승의 안광이 그녀에게서 번쩍이고 있었다. 높이 올려 묶은 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며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은 부름이 알던 너그럽고-자상하고-헌신적인 마리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내 이름은 유라.”



배신자! 도대체 왜 우리를 배반한 걸까? 분개하는 것도 잠시, 상상을 초월하는 진실이 부름의 마음을 박살 냈다.



“<콕슨 콘도르>의 선장이다.”







마지막 수정: 20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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